사극 드라마를 보면 조선 시대의 왕비는 모두 미인으로 나온 다. 드라마야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니까 그렇다 치고 실제로도 미인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 비 간택 (여럿 가운데 골라냄) 때의 외모 기준이다. 그 기준이 오 늘날과는 영 딴판이다.
외모를 따지는 것은 왕비 간택 제도가 수립된 과정에서 나 온다. 간택 제도가 생긴 연유부터 보자.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그에 관한 설명이 있다.
조선 초 태종이 이속이란 사람과 사돈을 맺으려고 사람을 보 냈는데 바둑을 두던 이속이 바둑을 끝까지 두고 난 후 왕의 사 절을 만나서는 태종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해버렸다. 왕 실과 결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태종은 왕실이 무 시당했다고 생각해 격노했고, 이속의 집을 몰수한 뒤 그 자녀 들에게는 금혼령을 대렸다. 이어 "향후 왕실의 배우자가 될 후 보들을 불러 심사하라"라고 명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태종 때까지 왕실과의 혼사는 양반 집안에 인기가 없었다. 정치적 이유(왕비 집안이라고 함부로 권력 을 휘두르다 멸문을 당한 집안이 있었다)나 경제적 이유(여러 종류의
한복을 지어 입혀서 궁에 들여보내야 하므로 금전적 부담이 컸다) 등으 로 왕실과 혼사를 꺼리는 풍토가 있었다. 딸을 숨기다가 발각 되어 곤욕을 치른 집안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간택 시기가 되면 전국에 7~30세 사이의 미혼 여성에 대한 금혼령이 내려지게 됐다.
간택할 때의 과정은 초간택-재간택-삼간택의 순으로 진행 된다. 초간택에서는 약 30~40명의 후보를 죽 늘어세운 뒤 발 뒤편에는 왕과 왕비가, 앞에는 궁녀 등 궁 사람들이 후보들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폈다. 절을 하게 해서 가풍을 보고, 다과 를 내와 먹는 모습과 태도를 통해 집안 예절 교육을 보았다.
왕비 간택 순서
초간택 : 30~40명의 후보를 놓고 행동거지를 심사 평가해
7~8명으로 추림 => 재간택: 인물 됨됨이와 인성을 평가해
후보를 3~4명으로 압축 => 삼간택: 왕과 왕비가 최종 1명을 선발
외모도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였다. 미모가 아니라 일종 의 관상을 봤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선 키는 크지 않아 야 했다. 이마와 머릿결 사이의 선이 갈매기 모양(M자 모양)이 아닌 둥근 모양이어야 했다. 눈은 쌍꺼풀이 지면 안 되고, 눈 꼬리가 약간 처져야 했다. 눈이 크고 넓으면 재물복이 없다고 본 것이다.
코는 끝이 뽀족 나오지 않은 둥근 모양에 입술은 얇아야 했 고 목도 길지 않아야 했다. 손발은 작은 반면 엉덩이는 커야 했 다. 다만 피부는 희고 고와야 했다. 게다가 가슴이 작고 턱도 주걱턱이어야 했다.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주걱턱은 성품이 착하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목이 두꺼우면 안 되는데 이는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 탓이었다. 양미간이 좁아서도 안 되었다. 이는 남자를 밝 힐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 근거였다. 게다가 입술이 자색(검붉은 색)이어서도 안 되었다. 건강하지 않아서 출산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심장병이 있 는 사람은 피가 잘 돌지 않아 입술이 자색인 경우가 많은데 이 걸 보면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관상법이었다.
이런 기준은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인자하고 어진 호감형 인 상을 가진 사람을 뽑는 데 맞춰져 있다. 성종의 왕비인 정현왕 후는 연산군을 내쫓는 중종반정 때 중종을 옹립하는 것을 승 낙한 인물로, 중종 1년 때 중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데 이런 기 준을 적용했다. 정현왕후는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가 폐위 된 뒤(아버지 신 씨가 중종반정을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됐다) 새 며느리 를 뽑을 때 “얌전하고 착한 것이 제일"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 시했다. 조선 시대에 왕비에 대한 평가는 인자함과 지성이 우 선이고 미모는 나중이었던 셈이다.
사실 미모 때문에 왕의 총애가 쏠리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삼간택까지 이른 3명 중 탈락한 두 사람은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궁으로 들어앉게 되는 수가 많았는데 실제로 미모의 후궁에게 왕의 애정이 쏠린 나 머지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던 탓이다.
당시에는 이 기준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중전, 세자비 간택 때는 물론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일반 가정에서도 며느리를 들일 때 적용했다고 한다. 그 기준들은 지금 생각하면 비과학 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오늘날 미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다.
이렇게 세상은 자꾸 변한다. 세상을 한 가지 잣대로만 바라봐 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상식으로 시작하는 한 뼘 인문학-최원석지음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지노선’은 최후의 보루가 아니다, 상식 알기 (0) | 2023.04.27 |
|---|---|
| 한글 띄어쓰기는 서양 선교사가 창안했다 (0) | 2023.04.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