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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조선의 왕비가 되려면 미모보다 관상

by 썬씽 2023. 7. 7.

사극 드라마를 보면 조선 시대의 왕비는 모두 미인으로 나온 다. 드라마야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니까 그렇다 치고 실제로도 미인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 비 간택 (여럿 가운데 골라냄) 때의 외모 기준이다. 그 기준이 오 늘날과는 영 딴판이다.
외모를 따지는 것은 왕비 간택 제도가 수립된 과정에서 나 온다. 간택 제도가 생긴 연유부터 보자.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그에 관한 설명이 있다.
조선 초 태종이 이속이란 사람과 사돈을 맺으려고 사람을 보 냈는데 바둑을 두던 이속이 바둑을 끝까지 두고 난 후 왕의 사 절을 만나서는 태종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해버렸다. 왕 실과 결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태종은 왕실이 무 시당했다고 생각해 격노했고, 이속의 집을 몰수한 뒤 그 자녀 들에게는 금혼령을 대렸다. 이어 "향후 왕실의 배우자가 될 후 보들을 불러 심사하라"라고 명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태종 때까지 왕실과의 혼사는 양반 집안에 인기가 없었다. 정치적 이유(왕비 집안이라고 함부로 권력 을 휘두르다 멸문을 당한 집안이 있었다)나 경제적 이유(여러 종류의
한복을 지어 입혀서 궁에 들여보내야 하므로 금전적 부담이 컸다) 등으 로 왕실과 혼사를 꺼리는 풍토가 있었다. 딸을 숨기다가 발각 되어 곤욕을 치른 집안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간택 시기가 되면 전국에 7~30세 사이의 미혼 여성에 대한 금혼령이 내려지게 됐다.
간택할 때의 과정은 초간택-재간택-삼간택의 순으로 진행 된다. 초간택에서는 약 30~40명의 후보를 죽 늘어세운 뒤 발 뒤편에는 왕과 왕비가, 앞에는 궁녀 등 궁 사람들이 후보들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폈다. 절을 하게 해서 가풍을 보고, 다과 를 내와 먹는 모습과 태도를 통해 집안 예절 교육을 보았다.
왕비 간택 순서
초간택 : 30~40명의 후보를 놓고 행동거지를 심사 평가해
7~8명으로 추림 => 재간택: 인물 됨됨이와 인성을 평가해
후보를 3~4명으로 압축  => 삼간택: 왕과 왕비가 최종 1명을 선발

외모도 중요한 판단 기준의 하나였다. 미모가 아니라 일종 의 관상을 봤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선 키는 크지 않아 야 했다. 이마와 머릿결 사이의 선이 갈매기 모양(M자 모양)이 아닌 둥근 모양이어야 했다. 눈은 쌍꺼풀이 지면 안 되고, 눈 꼬리가 약간 처져야 했다. 눈이 크고 넓으면 재물복이 없다고 본 것이다.
코는 끝이 뽀족 나오지 않은 둥근 모양에 입술은 얇아야 했 고 목도 길지 않아야 했다. 손발은 작은 반면 엉덩이는 커야 했 다. 다만 피부는 희고 고와야 했다. 게다가 가슴이 작고 턱도 주걱턱이어야 했다.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주걱턱은 성품이 착하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목이 두꺼우면 안 되는데 이는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 탓이었다. 양미간이 좁아서도 안 되었다. 이는 남자를 밝 힐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 근거였다. 게다가 입술이 자색(검붉은 색)이어서도 안 되었다. 건강하지 않아서 출산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심장병이 있 는 사람은 피가 잘 돌지 않아 입술이 자색인 경우가 많은데 이 걸 보면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관상법이었다.
이런 기준은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인자하고 어진 호감형 인 상을 가진 사람을 뽑는 데 맞춰져 있다. 성종의 왕비인 정현왕 후는 연산군을 내쫓는 중종반정 때 중종을 옹립하는 것을 승 낙한 인물로, 중종 1년 때 중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데 이런 기 준을 적용했다. 정현왕후는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가 폐위 된 뒤(아버지 신 씨가 중종반정을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됐다) 새 며느리 를 뽑을 때 “얌전하고 착한 것이 제일"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 시했다. 조선 시대에 왕비에 대한 평가는 인자함과 지성이 우 선이고 미모는 나중이었던 셈이다.
사실 미모 때문에 왕의 총애가 쏠리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삼간택까지 이른 3명 중 탈락한 두 사람은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궁으로 들어앉게 되는 수가 많았는데 실제로 미모의 후궁에게 왕의 애정이 쏠린 나 머지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던 탓이다.
당시에는 이 기준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중전, 세자비 간택 때는 물론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일반 가정에서도 며느리를 들일 때 적용했다고 한다. 그 기준들은 지금 생각하면 비과학 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오늘날 미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다.
이렇게 세상은 자꾸 변한다. 세상을 한 가지 잣대로만 바라봐 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 상식으로 시작하는 한 뼘 인문학-최원석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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